회춘은 과학 - GDF11

로봇 & 과학|2019. 8. 9. 17:05

회춘은 과학이다!

'피의 백작부인'으로 불린 헝가리의 바로티 에르제베트는 젊음과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서 처녀를 희생시켜 피를 마시고, 심지어 피로 목욕을 하기까지 했다. 50세인 1610년 체포될 때까지 바토리 르제베트가 희생시킨 처녀는 1,568명이 넘는다고 한다! 정말 황당무개하며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잔인한 일이기도 하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건 이렇게 피를 마시고 피로 목욕을 해도 노화를 막는데 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다. 400여 년 전에 살았던 에르제베트는 몰랐겠지만 중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소화 메커니즘을 배운 우리로서는 피를 먹어봐야 위장에서 소화(분해)되고 피로 목욕을 해도 피부로는 흡수되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에르제베트의 망상이 완전히 터무니없느 것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큰 틀에서는 제대로 짚은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방법이 잘못된 것이다. 만일 당시 수혈기술이 개발돼 에르제베트가 피를 마시는 대신 수혈을 했다면 원하던 대로 젊음과 미모를 더 오래 간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이든 사람이 젊은 사람의 피를 받으면 정마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피의 백작부인' 바토리 에르제베 트의 초상. 1585년 그려진 것으로 25세 때의 모습이다. 이때부터 25년 동안 수많은 처녀를 죽인 에르제 베트는 1610년 체포돼 재판을 받은 뒤 한 성의 골방에 갇힌 채 1614년 54세로 사망했다. (제공 위키피디아)


두 몸의 혈관을 이어준다면?

19세기 프랑스의 저명한 생리학자 폴 베르, Paul Bert는 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당시 이공계 최고 명문대였던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들어 갔지만 이게 아니다 싶어 법학으로 진로를 바꿨다가 이것도 아니다 싶어 결국 의학을 공부했다. 서른이 돼서야 의대를 졸업한 베르는 이듬해인 1864년 엽기적인 동물실험을 실시해 주목을 받았다. 쥐 두 마리의 혈관을 연결해 순환계를 공유하게 만든 것이다. 


혈관을 잘라 이어붙인 건 아니고 두 쥐의 옆구리 피부를 벗겨낸 뒤 서로 붙이는 간단한 수술이다. 상처가 아물면서 생성되는 모세혈관이 서로 연결되면서 두 쥐의 피가 섞이게 된 것, 베르는 한쪽 쥐의 혈관에 약물을 투입한 뒤 다른 쥐의 혈액을 뽑아 약물의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순환계가 진짜 통합됐음을 보였다. 훗날 '병체결합parabiosis'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엽기적인 실험을 한 공로로 베르는 1866년 프랑스과학아카 데미가 주는 상까지 받았다.



1864년 병체결합 방법을 개발한 프랑스의 생리학자 폴 베르, 오랫동안 잊힌 병체결합이 150년 만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 뒤 과학자들은 가끔씩 병체결합 실험을 하곤 했다. 예를 들어 혈당수치가 높으면 충치가 생긴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병체결합을 이용했다. 즉 쥐 한 마리에게만 설탕을 줬는데 두 마리에서 다 충치가 생기면 이 주장이 맞지만(순환계 공유로 둘 다 혈당수치가 높으므로) 설탕을 준 쥐에서만 생기면 틀리다. 실험결과 한 마리에서만 충치가 생겨 혈당 가설이 폐기됐다.


병체결합이 개발되고 거의 100년이 지난 1956년 미국 코넬대 클리브 맥케이 clive McCay 교수는 나이대가 다른 쥐들로 병체결합을 한 69쌍을 9~18개월 동안 유지한 결과 늙은 쥐의 체중과 골밀도가 짝인 젊은 쥐와 비슷해진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당시는 생화학과 분자생물학이 초보단계였기 때문에 그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없었고

결국 일회적인 관심으로 그쳤다. 그 뒤 병체결합은 과학사의 영역으로 사라지는 듯 했다.


다시 반세기 가까이 지난 1999년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면역학 연구로 학위를 받은 에이미 와저스 Amy Wagers 박사는 스탠퍼드대의 저명 한 줄기세포과학자 어빙 와이스먼rving Weissman 교수의 실험실에서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와저스 박사는 혈액줄기세포의 이동과 목적지를 추적하는 연구를 하고 싶었고, 1950년대 병체결합실험을 한 경험이 있던 와이스먼 교수가 이 방법을 추천했다. 즉 한 생쥐의 줄기세포에 형광표지를 한 뒤 병체결합을 하면 다른 생쥐에서 줄기세포의 위치를 쉽게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대학 토머스 란도 Thomas Rando 교수 실험실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있던 이리나 콘보이 Irina Conboy 박사는 2002년 와저스 박사의 논문으로 세미나를 했는데 이를 지켜보던 같은 실험실의 박사후연구원이자 남편인 마이클은 병체결합을 노화연구에 이용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물론 재발견이다!). 이들은 와저스 박사와 함께 실험을 설계했고 멋지게 성공했다. 


2005년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서 연구자들은 병체결합으로 늙은 쥐와 젊은 쥐의 혈관을 연결하자 늙은 쥐의 상처 회복 속도가 빨라졌다고 보고했다. 즉 젊은 쥐의 피 속에 있는 어떤 성분이 늙은 쥐 의 줄기세포가 활발하게 활동하도록 자극을 줬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줄기세포 능력이 떨어지는 건 줄기세포 자체가 늙어서가 아니라 재생 신호물질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연구결과다. 다음 단계로 연구자들은 이런 신호물질을 찾는 연구를 진행했다. 


8년이 지난 2013년 학술지 셀에는 오랫동안 찾아온 신호물질의 실체를 마침내 밝혀낸 놀라운 논문이 실렸다. 미국 하버드대 줄기세포 연구소에 자리를 잡은 와저스 교수와 브리검여성병원의 순환기내과의 리처드 리Richard Lee 교수는 젊은 쥐의 피와 늙은 쥐의 피 성분을 면밀히 비교해 차이가 큰 성분들을 골라냈다. 그리고 각각에 대해 늙은 쥐를 대상으로 회춘효과를 테스트한 결과 GDF11이라는 성분이 회춘인자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사람처럼 쥐도 나이가 들면 심장이 커지는 '심장비대'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심장비대는 이완심부전 등 여러 심장질환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연구자들은 먼저 병제결합 실험으로 넉달 동안 젊은 피를 받은 늙은 쥐의 심장이 다시 작아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음으로 늙은 쥐에 GDF11을 투여했다. 30일이 지난 뒤 살펴보자 역시 심장이 작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GDF11 이 젊은 피 회춘효과의 숨은 공로자였던 셈이다. 흥미롭게도 GDF11은 적혈구와 백혈구를 만드는 지라(비장)에서 역시 가장 왕성하게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그 양이 나이가 듦에 따라 줄어든다. 


2014년 5월 9일자 학술지 <사이언스>에는 GDF11의 또 다른 회춘효과를 밝힌 논문 두 편이 나란히 실렸다. 둘 다 와저스 교수팀과 공동 연구팀의 결과다. 먼저 노화의 대표적인 증상인 근육감소를 보이는 늙은쥐에게 4주 동안 매일 GDF11을 투여하자 근육의 힘이 돌아와 달리기도 잘하고 발가락의 쥐는 힘도 다시 세졌다는 것. 또 다른 실험에서는GDF11이 새로운 혈관이 자라게 하는 걸 돕고 후각신경세포(뉴런)를 늘려 노화에 따라 둔해진 후각이 다시 민감하게 됨을 증명했다. 다들 사람에서도 보이는 노화현상이므로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다. 게다가 사람에게도 GDF11이 존재한다. 사실 이 성분의 존재는 10여 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그 역할을 정확히 규명하지 못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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