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성장

로봇 & 과학|2019. 8. 30. 17:03

1950년대에 과수원이 늘어섰던 산타클라라밸리는 1960년대 들어서 반도체 산업을 필두로 하는 첨단기술 중심지로 바뀌어갔다. 이 시기에 많은 반도체 회사들이 산타클라라 밸리에 설립되었고, 본격적인 반도체 시대의 막이 올랐다. 반도체칩 제조에 필요한 장비, 재료, 서비스, 자금 투자 등 연관 산업도 동시에 발전해 산타클라라 밸리가 자급자 족하는 첨단기술 단지로 부상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기술 인력은 스탠포드 대학,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클라라 대학 등 인근 대학에서 공급받았고, 과수원에서 일하던 노동력으로 양질 의 노동력을 공급받았다.



1960년대는 반도체 산업이 트랜지스터에서 집적회로로 옮겨가는 시기였다. 당시 반도체 기술과 실리콘 밸리 발전의 주역은 페어차일드 반도체 였고, 페어차일드 반도체 성장의 핵심 인물은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였다.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성공은 노이스의 영감 inspiration과 무어가 흘린 땀의 결실이라는 말처럼, 반도체 사업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노이스와, 그의 오른팔 역할을 하면서 기술 개발을 이끈 무어의 상호 보완적 관계가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성장에 기여했다. 


당시 산타클라라 밸리는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의 신흥도시와 같은 분위기였고 마침내 '실리콘 밸리'라는 이름을 얻는다.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성장과 페어칠드런


1960년대에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양적·질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했다. 설립한 지 겨우 5년 만인 1962년 말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직원 수는 3천 명으로 늘었고 1965년에는 기존 대기업체인 TI와 모토롤라에 이어 반도체 생산량 3위 업체로 올라섰다. 페어차일드 반도체에서 발생한 수익으로 모기업 페어차일드 카메라 앤드 인스트러먼츠 사의 영업 실적이 좋아져 주가가 급등했다. 그러나 페어차일드 반도체에서 발생한 수익은 반도체 사업에 재투자되지 않고, 많은 부분이 모기업의 다른 사업에 사용되었다. 이에 대해 페어차일드 반도체 직원들의 불만이 점점 커졌고, 우수한 직원들이 페어차 일드 반도체를 떠나 결국 페어차일드 반도체가 쇠퇴하는 원인이 되었다.



초기에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웨이퍼 공정과 조립, 시험 등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모든 공정을 실리콘 밸리를 비롯해 북가주 일대에 널려 있는 페어차일드 반도체 공장에서 수행했다. 반도체 칩을 패키지에 넣는 조립 공정과 전기적 특성 시험을 위해 고용한 직원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반도체 조립은 노동집약적 산업이다. 경쟁 업체와의 원가 경쟁이 심해지면서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반도체 조립을 임금이 낮은 아시아 국가에 내보내기로 결정하고 1960년대 중반 홍콩에 조립공장을 설립했다. 


홍콩의 임금이 이내 가파 른 상승세를 보이자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1960년대 후반, 한국에 페어차일드 코리아를 설립하고 반도체 조립공장을 가동했다. 비슷한 시기에 모토롤 라와 전직 페어차일드 반도체 직원들이 창업한 시그네틱스Signetics도 한국에

조립공장을 세우고 가동에 들어갔다. 반도체 조립산업은 낮은 임금에 의존하는 노동집약적 산업이긴 하지만 당시 이 기업들의 한국 진축은 하국이 반도체 산업에 첫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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