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지스터의 발명

로봇 & 과학|2019. 8. 30. 15:14

20세기 초는 현대물리학이 개화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시기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고 빛이 파동과 입자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녔다는 사실에서부터 원자 내부에서 전자의 움직임과 에너지 상태, 고체의 전기적 특성에 이르기까지 물리학자들이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고 양자역학이 눈부신 발전을 이룬 시기가 바로 이때다. 이후 고체물리학 발전의 산물로 트랜지스터가 발명됨으로써 20세기 중반 반도체 시대의 막이 올랐다. 20세기 초반부터 전자제품의 핵심 부품으로 사용해온 진공관은 실리콘 밸리가 태동하고 반도체 산업이 불붙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반도체로 급속히 대체되기 시작했다. 


트랜지스터의 발명, 막 내린 진공관 시대 


20세기 초 리 디포리스트가 삼극 진공관을 발명한 후 본격적인 전자산업 시대가 열렸다. 그 후 약 50년 동안 진공관은 라디오, TV, 녹음기 등 가전제품부터 레이더, 전화교환기, 무선통신 장비, 계측기기, 컴퓨터를 비롯해 산업용, 상업용, 군수용 등 거의 모든 전자제품의 핵심 부품으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진공관의 응용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진공관이 가지고 있는 결점 또한 점차 심각한 문제로 나타났다. 진공관은 진공 상태인 유리관 속에 금속 필라멘트가 들어 있는 구조다. 진공관은 이 금속 필라멘트에 전류가 흐를 때 뜨거운 필라멘트 표면에서 진공으로 방출되는 전자의 흐름을 제어해 전기적 신호를 정류하거나 증폭하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진공관은 크고 무겁고 열을 많이 발생하며 전력 소모가 많은 데다 수명이 짧다.



이러한 진공관의 결점은 당시 진공관을 많이 사용하는 컴퓨터나 전화 교환기 등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고, 진공관을 대체할 새로운 소자가 절심히 필요했다. 한 가지 예로 1943년에서 1946년까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 하교 전기공학과 교수팀이 제작한 진공관 컴퓨터 '에니악 ENIAC: Electronic Nurmeries Integrator and Calculator'이 진공관의 문제점을 잘 보여준다. 근대 디지털 컴퓨터의 효시라 불리는 에니악 컴퓨터는 미국 육군의 자금 지원을 받아 포탄의 탄도를 계산할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진공관을 약 1만 8천개 사용한 컴퓨터 에니악의 크기는 집채만 한 데다가 전력 소모가 많고 발

생하는 열도 엄청났다. 더구나 당시에는 진공관의 신뢰성이 좋지 않아 여기저기 수시로 고장이 나 진공관을 교체하는 사람이 늘 대기해야 했다. 진공관식 전화교환기를 사용하던 미국전화전신회사AT&T: American Trelephone and Telegraph Company 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고체물리학자 윌리엄 쇼클리 william Shockley는 전쟁 기간 동안 국방성 파견 임무를 마치고 1945년 가을에 벨 연구소로 복귀했다. 벨 연구소는 쇼클리를 진공관을 대체할 새로운 소자 개발팀이 책임자로 임명했고, 벨 연구소의 실험물리학자 월터 브래튼과 물리학자 존 바딘으로 연구진을 구성했다. 존 바딘과 원터 비의 노력 끝에 새로운 고체 소자 개발에 성공했다. 1947년 12월 23일  바딘과 브래튼은 개발 결과를 벨 연구소 임직원들에게 발표했 소자를 트랜지스터 transistor라고 이름 붙였다. 성능 개선과 추가시험, 특허출원 등을 마치고 벨 연구소는 1948년 7월, 트랜지스터를 외부에 소개하는 공식 행사를 마련해 언론기관에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러나 트랜지스터에 대한 언론과 일반인의 관심은 냉담했다. 트랜지스터는 단지 스위치를 켜면 진공관처럼 뜨거워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금방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진공관 제조업체들은 벨 연구소가 실용성이 없는 소자로 여론몰이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곧이어 불어닥칠 전자기술의 혁명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20세기 전반에 전자산업을 주도해왔던 진공관이 머지않아 자취를 감추고, 20세기 후반의 전자산업과 사회 전반에 획기적인 발전과 변화를 가져올 반도체 시대가 이미 막이 오르고 있었다.


전신전화 회사인 AT&T는 트랜지스터를 전화교환기 이외의 다른 분야에 응용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트랜지스터 특허권을 보유한 벨 연구소의 모회사 웨스턴 일렉트릭 Western Electric은 특허 사용권을 원하는 회사에 사용료를 받고 허용하기로 했다. 초기에 보청기는 트랜지스터의 좋은 응용 분야였다. 웨스턴 일렉트릭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보청기 제작회사에 사용료를 받지 않고 특허 사용을 허락했다.


한편, 1950년대 중반 벨 연구소에서 승진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쇼클리는 트랜지스터의 상용화를 위해 사업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그는 당시 다른 회사에서 생산하던 저마늄 트랜지스터에 비해 성능과 양산성이 우수한 실리콘 트랜지스터를 개발, 생산할 계획을 세우고 1955년 벨 연구소를 사직했다. 회사 세울 곳을 찾으려고 미국 전역을 돌아 보던 쇼클리는 결국 어린 시절에 성장했던 팔로알토의 남쪽 마운틴뷰로 정했다. 쇼클리가 회사를 설립할 때 그의 캘리포니아 공대 (캘텍Caltech: 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 동문인 아널드 베크만이 자금을 대주었다. 베크만은 쇼 클리가 자신의 회사가 있는 LA 인근에 설립하기를 바랐지만 쇼클리는 스탠포드 대학 교수 프레더릭 터먼의 권유에 따라 스텐포드 대학교 남쪽 마우 탄뷰에 회사를 설립했다. 팔로알토에는 그의 모친이 살고 있기도 했다. 클리가 베크만의 희망대로 남가주 패서디나 Pasadena 또는 LA 인근에 회사를 설립했다면 아마 실리콘 밸리는 남가주에서 태동했을지도 모른다. 어쨋든 쇼클리는 1955년 마운틴뷰에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Shockley Semiconduct Laboratory를 설립함으로써 산타클라라 밸리에서 반도체 산업이 불붙는 계기를 마련했다.


트랜지스터의 발명은 20세기 과학기술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트랜지스터 발명은, 과학기술자들이 인간 생활의 개선 그리고 인류 문명과 사회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실리콘 밸리의 반도체 기술혁명으로 이어져 집적회로를 개 발함에 따라 컴퓨터의 소형화와 고성능화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어서 인터넷 시대의 도래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술 발전은 우리의 경제 활 동뿐 아니라 정치, 사회 그리고 개인의 행동과 사고방식 등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반도체는 전자산업뿐 아니라 산업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핵심 부품으로 사용되어 산업의 생산성과 효율 성을 급속히 높였고, 종이 없는 정보사회의 개막을 예고했다. 따라서 반도체 기술혁명을 '제3의 산업혁명’, 또는 '연기 없는 산업혁명' 등으로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또한 반도체는 '산업의쌀'이라 불리기도 하고, 현대 사회의 에너지원인 원유에 비유되기도 한다. 쌀이 주식인 우리에게 '산업의 쌀은 마음에 와 닿는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이지만 이제 반도체에서 세계적인 강국이 되었으므로 반도체는 우리에게 원유와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세 명의 과학자(브래튼, 바딘과 쇼클리)는 1956년에 물리학 부문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다. 노벨상 심사위원회는 양자역학과 고체물리학 발전의 결실로 탄생한 트랜지스터의 학문적 기술적 중요성을 인정해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지 불과 9년 만에 노벨상을 수여한 것이다. 당시 세계 최첨단기업 연구소 가운데 하나인 벨 연구소의 이상적인 연구 분위기에서 뛰어난 과학자들이 긴밀한 결속력으로 발명한 것처럼 보이는 트랜지스터! 


그러나 그 개발 과정에는 극도의 경쟁심, 갈등과 불신, 증오 등이 얽혀 있어 마치 한 편의 TV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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