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쇼클리 : 천재 물리학자의 일그러진 인생

로봇 & 과학|2019. 8. 30. 16:49


쇼클리는 트랜지스터 개발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고, 실리콘 밸리의 태동과 관련한 역할로 '실리콘 밸리의 아버지Father of Silicon Valley', '전자산업 시대의 개척자'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프레더릭 터먼을 실리콘 밸리의 대부Godfather of Silicon Valley'라고 부르듯 쇼클리도 '실리콘 밸리의 아버지'로 불릴 만한 자격이 있

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감당하기 힘든 괴팍한 성격과 인생 후반부에 보여 준 논란 많은 행적은 그의 인생에 오점을 남겼다. 그의 인생 말년에 이르러 젊은 시절의 친구들을 비롯해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와 관계를 끊었고,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릴 정도로 그는 주류 사회에서 기 피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그의 자녀들까지 그 곁을 떠났다. 이러한 사실들로 반도체와 20세기 전자공학에 기여한 과학자로서 쇼클리의 공로가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는 면이 있어 아쉬운 감이 있다. 


쇼클리의 인생은 50세까지의 전반과 그 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후반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전반과 후반의 인생은 극명한 대비 를 이룬다. 그의 전반기 인생은 트랜지스터를 발명하고 반도체와 전자산업 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천재 과학자로서의 삶이었던 데 비해 후반 인생은 인 간 지능의 유전성, 인종 간의 지능 격차, 인종 개량 등 유제닉스 eugenics에 편집증처럼 매달린 일그러진 인생이었다.


천재 과학자에서 우생학의 전도사로 그의 삶이 바뀌게 된 분기점은 바로 1957년 회사의 핵심 연구 인력 여덟 명이 집단 이탈한 사건이었다. 화가 난 쇼클리가 '여덟 명의 배신자들 raltorous eight'이라고 불렀다는 그 과학기술자들은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집단 사직한 뒤 1957년 9월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설립함으로써 실리콘 밸리 탄생의 주역이 되었다. 이들이 빠져나가자 쇼클리의 회사는 걷잡을 수 없는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회사 설립 이후 흑자를 낸 해가 한번도 없었던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는 1960년에 클리블랜드의 한 회사가 인수했고, 이어서 1966년 거대기업 ITT에 매각된 뒤 결국 간판을 내렸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회사 운영에서 물러난 쇼클리는 스탠포드 대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반도체, 고체물리, 전자공학 등에서 강의를 하고 세미나를 주관했지만 연구 활동은 전자공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유제닉스였고, 65세에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한 후에도 유제닉스 연구를 계속했다.



유제닉스는 인간의 지능과 인성 등 인간의 질을 개선하려는 노력이다. 유제닉스 주창자에 따르면, 인류의 질은 방관하고 있으면 다윈의 진화론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 인류 전체의 평균 질이 점점 낮아진다고 주장한다.


적자생존, 자연도태로 요약되는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이 자연계에서 진화하는 원리를 설명하지만, 문명사회에서 생활하는 인류는 진화론과는 반대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능이 낮거나 생활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 이를테면 알코올 중독자, 정신장애자, 범죄자 등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일수록 자식을 많이 낳고 또한 사회보장 제도, 자선활동 따위의 혜택으로 자손 증식이 계속되어 그 결과 인류 전체의 평균 질이 낮아진다는 논리다. 


인간의 질을 개선하려면 정부가 개입해서 결혼 금지, 불임 시술, 유산 등을 유도하거나 강제적으로 실시해아 하거나 강제적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제닉스는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인기를 얻었다. 유럽 각국에서 밀려온 이민자들들을 받아들이던 미국은 이민자들의 질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고, 미국 시민 전체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간광받았다. 당시 유제닉스는 미국 지식층과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게서 많은 호응을 얻었는데 노벨 화학상과 평화상을 수상한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 우드로 윌슨 wondroy Vilson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 당시 하버드 대학교 총장, 스탠포드 대학교 총장 등이 유제닉스 옹호자였다. 프레더릭터먼의 부친인 루이스 터먼이 IQ 테스트를 개발해 이를 이용해서 영재를 발굴하고 영재 교육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것도 인간의 질을 개선하려는 노

력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로 미국의 많은 주에서는 유제닉스와 관련한 법을 제정하고 시행했다. 20세기 전반의 약 50년 동안 정부 시책으로 미국 전역에서 강제 불임 시술을 받은 사람이 무려 6만 명에 달했다. 유제닉스 활동은 특히 캘리포니아에서 활발했는데 미국 전역에서 강제 불임 시술을 받은 사람들 중 약 3분의 1이 캘리포니아 주민이었다. 스탠포드 대학교 초대 총장인 데이비드 조던David Jordan은 연방정부의 유제닉스 정책 활동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유제닉스는 독일에서 나치 정권이 인종 청소, 유대인 학살 등 의 만행을 저지르며 이를 합리화하는 이론적인 근거로 사용하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로 그 활동이 퇴조했고 유제닉스라는 용어를 금기로 여기게 되었다.


쇼클리가 유제닉스에 매달리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다. 이미 퇴조한 유제닉스에 다시 불을 붙이려고 애를 쓴 것이다. 비록 유전공학자, 생물학자 또는 사회학자는 아니었지만 노벨 수상자로서 인간 개량, 인간 지능의 개선 이라는 주제를 다룬 쇼클리의 학문적 비중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예리한 과학자답게 통계적인 분석으로 인간의 지능, 인종 간의 지능 격차 등의 문제 를 다루면서 사회적 금기로 여기는 인종 간의 지능 격차를 공개적으로 거론 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어느 저명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흑인과 백인 간의 지능 격차를 언급하면서 흑인의 평균 IQ 점수가 백인보다 15점이 낮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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